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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가와 나오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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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오가와 나오야는 유도 선수, 프로레슬러, 종합격투기 선수 등 다양한 분야에서 활동한 일본의 스포츠 선수이다. 고등학교 시절 유도를 시작하여 메이지 대학교에서 유도 선수로 활약했으며, 1987년 세계 유도 선수권 대회에서 최연소 우승을 차지하는 등 뛰어난 실력을 보였다. 1992년 바르셀로나 올림픽에서 은메달을 획득했으며, 전일본 유도 선수권 대회에서 7회 우승을 기록했다. 유도 은퇴 후에는 프로레슬링과 종합격투기 선수로 활동하며, 신일본 프로레슬링에서 하시모토 신야와 대립하며 큰 화제를 모았다. 종합격투기 선수로도 활동하며 PRIDE 등에서 활약했고, 현재는 유도 도장을 운영하며 후진 양성에 힘쓰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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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가와 나오야 - [인물]에 관한 문서
기본 정보
2011년 오가와
2011년 오가와
이름오가와 나오야
다른 이름오짱
캡틴 허슬
무모함의 왕
출생일1968년 3월 31일
출생지도쿄도스기나미구
국적일본
193cm
몸무게115kg
체급헤비급
격투 스타일유도
활동 기간1997년–2005년 (MMA)
종합격투기 전적
KO 승리2
서브미션 승리5
서브미션 패배2
유도 정보
체급+95kg, 무제한급
7단
올림픽 순위2위
올림픽 연도1992년
올림픽 체급남자 +95kg
세계 선수권 순위1위
세계 선수권 연도1987년
세계 선수권 체급무제한급
세계 선수권 연도21989년
세계 선수권 체급2+95kg
세계 선수권 연도31989년
세계 선수권 체급3무제한급
세계 선수권 연도41991년
세계 선수권 체급4무제한급
지역 선수권 유형AS
지역 선수권 순위1위
지역 선수권 연도1988년
아시안 게임동메달
메달 기록
메달 템플릿메달|스포츠| 남자 유도
메달|국가|
메달|대회| 올림픽
메달|은| 1992 바르셀로나 | +95kg
메달|대회| 세계 선수권 대회
메달|금| 1987 에센 | 무제한급
메달|금| 1989 베오그라드 | +95kg
메달|금| 1989 베오그라드 | 무제한급
메달|금| 1991 바르셀로나 | 무제한급
메달|동| 1991 바르셀로나 | +95kg
메달|동| 1993 해밀턴 | 무제한급
메달|동| 1995 지바 | +95kg
메달|대회| 아시안 게임
메달|동| 1990 베이징 | +95kg
메달|대회| 아시아 선수권 대회
메달|금| 1988 다마스쿠스 | 무제한급
메달|대회| 하계 유니버시아드
메달|금| 1988 트빌리시 | +95kg
메달|동| 1986 상파울루 | 무제한급
프로레슬링 정보
링네임오가와 나오야
캡틴 오
유도 오
헐크 오건
본명오가와 나오야
닉네임폭주왕
캡틴 허슬
스포츠 경력유도
검도
수영
야구
트레이너안토니오 이노키
사야마 사토루
데뷔1997년 4월 12일
은퇴2018년 6월 11일
유튜브 정보
채널 URL오가와 나오야의 허슬 채널
채널 이름오가와 나오야의 허슬 채널
조회수173만 회
활동 시작일2024년 1월 30일
장르프로레슬링
유도
구독자 수2만 명
통계 업데이트 날짜2024년 12월 26일

2. 유도 선수 시절

오가와 나오야는 고등학교 시절 유도를 시작하여 메이지 대학에 진학한 후 기량이 만개했다. 대학 2학년 때 유도 역사상 최연소 세계 프리클래스 챔피언이 되었으며,[4] 졸업 전까지 세계 유도 선수권 대회에서 7개의 메달을 획득하는 등 뛰어난 성적을 거두었다.

전일본 유도 선수권 대회에서는 1989년부터 1993년, 1995년부터 1996년까지 총 7번 우승하여, 야마시타 야스히로의 9회 우승에 이어 역대 두 번째로 많은 우승 기록을 세웠다.[4] 올림픽에서는 1992년 바르셀로나 올림픽에서 은메달을 획득했고, 1996년 하계 올림픽에서는 5위를 기록했다.[5]

그의 유도 스타일은 신중하고 지능적이라는 평가를 받았으나, 경기 초반 3분간 상대를 압박하며 탐색전을 벌이다 점수를 노리는 전략 때문에 3分間柔道|산분칸 주도일본어라는 별명을 얻기도 했다. 이 때문에 일본 언론으로부터 소극적이라는 비판을 받기도 했다.[6] 오가와는 우치마타, 코소토가리, 코소토가케, 사사에쓰리코미아시, 타이오토시, 스쿠이나게 등의 기술을 주로 사용했으며, 때로는 서서 팔가로누워꺾기를 사용하여 사사에쓰리코미아시나 무릎대돌리기를 시도하기도 했다.[7] 굳히기 (네와자) 기술은 잘 사용하지 않았고, 메치기 기술이 실패했을 때만 누르기 (오사에코미와자)를 시도했다.[8]

1996년 애틀랜타 올림픽에서의 성적 부진 이후 비판 여론이 일었고, 결국 오가와는 프로 유도계에서 은퇴하게 되었다.[9] 그의 1987년부터 1996년까지 국제 유도 경기 통산 기록은 47승 9패이다.[10]

은퇴 후 오가와는 가나가와현 치가사키에 자신의 유도 도장을 열고 후진 양성에 힘쓰고 있으며, 올림픽 및 패럴림픽 유망주들을 지도하고 있다.[11]

2. 1. 고등학교 시절

오가와는 하치오지 고등학교 재학 시절 유도를 시작했다. 입학 면접 시험에서 면접관이자 훗날 은사가 되는 오노 미노루(小野実)가 그의 큰 체격을 보고 유도를 권유했다. 사실 오가와는 럭비에 관심이 있었으나, 좋은 인상을 주기 위해 유도를 하고 싶다고 답하여 합격했다.[22][23]

고등학교 입학 후, 유도부 부장인 오노와 감독 가와노 쇼고(川野昭吾)의 지도를 받으며 실력을 키웠다. 고등학교 3학년 때는 금구기 대회에서 베스트 16에 진출하며 두각을 나타내기 시작했다. 오가와는 훗날 이 대회를 통해 유도에 대한 자신감을 얻게 되었다고 회고했다. 인터하이 헤비급에서는 텐리 고등학교의 나카타니 히로시(中谷弘)에게 패배하여 입상하지 못했지만, 국민 체육 대회에서는 세타가야가쿠엔 고등학교의 고가 도시히코와 함께 활약하며 도쿄팀의 우승에 기여했다.

고등학교 시절, 아버지가 후원하던 스모의 오시오가와베야를 방문한 적이 있다. 당시 사범이었던 전 오오제키 다이키린인 오시오가와 오야카타는 오가와에게 "네 능력이면 좋은 오오제키가 될 수 있다"며 스모계 입문을 권유하기도 했다. 또한 전 리키시였던 기토류키 다다시게는 "만약 스모를 했다면 와카-다카 형제의 좋은 라이벌이 되었을지도 모른다"며 그의 스모계 비진출을 아쉬워했다.[24]

2. 2. 대학교 시절

1986년 4월, 오가와는 메이지 대학 경영학부 경영학과에 입학했다.[4] 유도부 감독 카미무라 하루키와 부감독 하라 요시미의 지도 아래 기량을 갈고 닦았다. 당시 카미무라는 전일본 감독을 겸임하여 바빴기 때문에, 하라 부감독이 주로 도장에서 오가와를 직접 지도했다.[23][25] 같은 해 11월, 전일본학생유도선수권대회 (무차별급)에서 1학년임에도 불구하고 결승에 진출하여 도카이 대학의 세키네 히데유키에게 2-1 판정승을 거두고, 야마시타 야스히로 이후 10년 만에 1학년 챔피언이 되었다. 오가와는 훗날 은퇴 기자회견에서 이 우승이 가장 기억에 남는다고 회고했다.[23][25] 이어진 전일본 신인 체급 선수권 대회에서는 준결승에서 니혼 대학의 키노 준에게 판정패하여 3위를 차지했다. 12월에는 브라질 상파울루에서 열린 세계학생유도선수권대회에 출전하여 첫 경기에서 대한민국의 김건수에게 패했지만, 3위 결정전에서 폴란드의 예르지 코라노프스키를 꺾고 3위에 올랐다. 단체전에서는 일본 팀의 우승에 기여했다.[26]

1987년 1월, 쇼리키 국제 무차별급에 출전하여 준결승에서 당시 외국 선수 중 최강으로 꼽히던 소련의 그리골리 베리체프를 허리껴치기로 꺾었으나, 결승에서 동독의 헨리 슈톨에게 패하며 2위를 차지했다. 그러나 베리체프를 상대로 거둔 한판승으로 언론으로부터 사이토 히토시, 마사키 요시미에 이은 헤비급의 차세대 주자로 주목받기 시작했다.[27] 6월에는 당시 전일본학생유도연맹과 대립 관계에 있던 전일본대학유도연맹이 주최하는 전일본대학유도체급선수권대회에서 우승했지만, 전일본학생유도우승대회에서는 8강에서 탈락했다. 7월, 전일본선발유도체급선수권 결승에서 신일본제철 소속의 타키 요시나키를 판정으로 꺾고 첫 우승을 차지하며 세계선수권 대표 후보로 뽑혔다. 10월 쇼리키컵 결승에서는 고교 시절부터 약했던 키노 준을 판정(3-0)으로 꺾고 6번의 맞대결 만에 처음으로 승리하며 우승했다.[28] 11월, 서독 에센에서 열린 세계 유도 선수권 대회에 후보 선수로 참가했다. 당초 2체급에 출전 예정이던 마사키 요시미가 95kg급 첫 경기에서 베리체프에게 패하며 허리 부상이 악화되어 무차별급 출전을 포기하자, 오가와가 대신 출전하게 되었다.[29] 예선에서는 다소 고전했지만, 준결승에서 소련의 하빌 비크타셰프를 꺾고 결승에 진출했다. 결승에서는 영국의 엘비스 고든을 상대로 작은 바깥 걸기로 유효를 따내 우세승을 거두며, 만 19세 7개월의 나이로 유도 역사상 최연소 세계 챔피언이 되었다. 이 우승으로 오가와는 1988년 서울 올림픽 95kg급 대표 유력 후보로 떠올랐다.[29] 귀국 직후 출전한 전일본선발유도단체선수권대회에서는 아이치현경찰의 슈카와 유타카에게 밭다리 되치기로 한판패를 당했지만, 소속팀은 3위를 차지했다.[29] 12월, 최연소 세계 챔피언 등극을 인정받아 일본스포츠상 대상을 수상했다.

1988년 4월, 추천 선수로 전일본 유도 선수권 대회에 처음 출전했지만, 8강에서 86kg급 선수인 아사히카세이 소속의 오오사코 아키노부에게 판정패하며 사이토, 마사키와의 올림픽 대표 경쟁에서 크게 뒤처졌다.[30] 6월 체급별 선수권 대회 준결승에서 마사키 요시미를 판정으로 꺾었으나, 결승에서 사이토 히토시에게 패하며 2위에 머물러 올림픽 대표팀에 선발되지 못했다. 이어진 학생 우승 대회에서는 3위를 차지했다. 8월 다마스쿠스에서 열린 아시아 유도 선수권 대회 무차별급에서는 준결승에서 북한의 황재길, 결승에서 중국의 서국청을 모두 한판으로 꺾고 우승했다. 10월 쇼리키컵 결승에서는 세키네 히데유키에게 허벅다리걸기로 유효를 따내며 2연패를 달성했다. 또한 전일본 학생 선수권 대회 결승에서는 쓰쿠바 대학오카다 히로타카가 부상으로 기권하면서 부전승으로 2년 만에 두 번째 우승을 차지했다. 12월 선발 단체전에서는 3위에 머물렀다. 이어 조지아의 트빌리시에서 열린 세계 학생 선수권 대회 95kg급에 출전하여 모든 경기에서 한판승으로 우승했지만, 단체전에서는 2회전에서 패했다.[31]

1989년 3월, 전일본 선수권 도쿄 예선에서 우승했고, 4월 본선에서는 사상 처음으로 대학생 간의 결승 대결이 성사된 가운데 세키네 히데유키를 곁누르기 한판으로 꺾고 첫 우승을 차지했다. 6월 학생 우승 대회에서는 소속팀인 메이지 대학이 도카이 대학에 패하며 2위를 차지했다. 7월 체급별 선수권 대회 결승에서는 다시 만난 세키네 히데유키를 발목 받치기로 꺾고 우승하여, 세계 선수권 대회에서는 95kg급과 무차별급 모두 대표가 되었다.[31] 10월, 유고슬라비아 베오그라드에서 열린 세계 유도 선수권 대회에 출전하여, 95kg급 결승에서는 쿠바의 프랑크 모레노를 곁누르기로, 무차별급 결승에서는 소련의 아카키 키보르잘리제를 위누르기로 각각 꺾었다. 총 8경기를 모두 한판승으로 장식하며 압도적인 기량으로 2체급 제패를 달성했다.[32]

1990년 3월, 메이지 대학을 졸업했다.

2. 3. 사회인 시절

1990년 4월 일본중앙경마회(JRA)에 입사하여 서비스 추진부 보안 기획과 소속으로 근무했다.[22] 오가와는 당시 업무에 대해 "경마는 도박이라 열중한 나머지 주위 고객에게 피해를 주는 분들이 있다. 그럴 경우 긴급 상황으로서 부상을 입히지 않는 정도로 제압하는, 간단히 말해 JRA 직속 경비원이었다"고 설명했다.[33] 그는 느리고 지적인 유도 스타일로, 상대를 압박하는 데 시간을 투자한 후 점수를 얻으려는 전략 때문에 3分間柔道|3분간 유도일본어라는 별명을 얻기도 했으나, 일본 언론으로부터 소극적이라는 비판을 받기도 했다.[6]

사회인이 된 후에도 선수 생활을 이어갔다. 1990년 전일본 유도 선수권 대회에서는 결승에서 '헤이세이의 사사로'라 불리던 고가 토시히코를 꺾고 대회 2연패를 달성했다.[34] 같은 해 9월 베이징 아시안 게임에서는 일본 선수단 주장을 맡았으나, 95kg급 이상 준결승에서 북한 선수에게 패하며 동메달에 머물렀다. 11월 가노컵에서는 95kg 이상급과 무차별급에서 모두 우승하며 2체급 제패를 달성했다.[31]

1991년 4월 전일본 선수권 대회에서 우승하며 3연패를 달성했고,[31] 7월 스페인 바르셀로나에서 열린 세계 유도 선수권 대회에서는 95kg 이상급에서 동메달을 획득했다. 무차별급에서는 "우승하지 못하면 현역을 은퇴하겠다"는 각오로 출전하여[35][36] 결승에서 소련의 다비드 하하레이시빌리를 꺾고 우승, 세계 선수권 무차별급 3연패를 이루었다.[35]

1992년 4월 전일본 선수권 대회 4연패를 달성하고[31] 1992년 바르셀로나 올림픽 대표로 선발되었다. 올림픽 결승에서 EUN 소속의 하하레이시빌리에게 패하며 은메달에 머물렀다.[37] 오가와는 올림픽에서 우승하면 유도를 그만두려 했으나,[38] 패배 후 은퇴를 고민하다가 은사의 설득으로 현역 생활을 이어갔다.[39]

1993년 4월 전일본 선수권 대회에서 우승하며 5연패를 달성했다.[39] 그러나 10월 캐나다 해밀턴에서 열린 세계 선수권 대회 무차별급에서는 준결승에서 폴란드의 라파우 쿠바츠키에게 패하며 동메달에 그쳤고, 이로써 일본 선수의 세계 선수권 무차별급 연속 우승 기록은 13회에서 멈추게 되었다.[23][41]

1994년 4월 전일본 선수권 대회 준결승에서 요시다 히데히코에게 판정패하며 대회 6연패 달성에 실패했다. 오가와는 이후 이 시기 판정에 대해 불만을 표하기도 했다.[23]

1995년 4월 전일본 선수권 대회 결승에서 시노하라 신이치를 꺾고 2년 만에 통산 6번째 우승을 차지했다.[23] 같은 해 9월 마쿠하리에서 열린 세계 선수권 대회에서는 95kg 이상급 동메달을 추가했다.[42]

1996년 4월 전일본 선수권 대회에서 우승하며 통산 7번째 우승을 달성하고 1996년 애틀랜타 올림픽 대표로 선발되었다.[42] 이는 야마시타 야스히로의 9회 우승에 이어 역대 두 번째로 많은 전일본 선수권 대회 우승 기록이다.[4] 그러나 7월 애틀랜타 올림픽에서는 8강에서 쿠바츠키에게 판정승을 거뒀으나, 준결승에서 프랑스의 다비드 두예에게, 동메달 결정전에서는 독일의 프랑크 몰러에게 연이어 패하며 5위에 그쳤다.[43]

애틀랜타 올림픽 이후, 1996년 9월 전일본 유도 연맹에 국제 경기 강화 선수 사퇴서를 제출하며 국제 대회에서 은퇴했다.[23] 이후 1997년 2월 JRA를 퇴직하고 프리 격투가로 전향을 선언했다.[44]

3. 프로레슬링 선수 시절

1996년 애틀랜타 올림픽을 마지막으로 유도 선수 생활을 마감하고, 전일본 유도 연맹에 국제 경기 강화 선수 사퇴 신고를 제출하며 현역에서 은퇴했다.[23] 이듬해인 1997년 2월, JRA를 퇴직하고 프리랜서 격투가로 전향을 선언했다.[44] 같은 해, 안토니오 이노키가 이끄는 UFO(유니버설 파이팅-아츠 오거나이제이션)를 통해 신일본 프로레슬링에 합류하며 프로레슬러로서의 경력을 시작했다.

3. 1. 신일본 프로레슬링 (1997–2001)

1997년, 오가와는 신일본 프로레슬링(NJPW) 회장 안토니오 이노키가 추진하는 UFO(유니버설 파이팅-아츠 오거나이제이션) 프로젝트에 합류했다. 그는 전설적인 프로레슬러이자 종합격투기의 선구자인 사야마 사토루에게 훈련을 받았다.

같은 해 4월 12일, 오가와는 도쿄 돔에서 열린 경기에서 신일본 프로레슬링 무대에 데뷔했다. 당초 켄 샴록과 맞붙을 예정이었던 당시 IWGP 헤비급 챔피언 하시모토 신야의 대체 상대로 나선 것이다. 예상치 못한 결과로 오가와는 누드 초크 기술로 하시모토를 꺾으며 단숨에 주목받았고, 5월 3일 오사카 돔에서 열린 IWGP 헤비급 타이틀 매치 기회를 얻었다. 하지만 이 경기에서는 하시모토의 머리 발차기에 실신 KO패하며 하시모토가 타이틀을 방어했다. 이 경기는 오가와와 하시모토 간의 오랜 라이벌 관계의 시작점이 되었다.

1997년과 1998년 동안 오가와는 NJPW에서 "다른 스타일의 경기"라는 명목 아래 자신과 같이 실제 격투기 경험이 있는 선수들과 주로 대결했다. 그는 슈트 스타일 레슬러 야마자키 가즈오, 암 레슬링 선수 스콧 노턴, 얼티밋 파이팅 챔피언십(UFC) 출신 브라이언 존스턴과 돈 프라이, 네덜란드 무술가 에르윈 브리커 등을 꺾었다. 유일한 패배는 그레이트 무타의 반칙 기술인 아시안 미스트에 의한 것이었다. 1998년 3월, 오가와는 이노키 은퇴 기념 '파이널 이노키 토너먼트'에 참가하여 존스턴과 데이브 베네토를 꺾고 결승에 진출했으나, 돈 프라이에게 패배했다. 이 패배 이후 그는 특별 훈련에 돌입했고, 유도복 대신 검은색 타이츠와 부츠, 오픈 핑거 글러브를 착용하기 시작했다.

1999년 1월 4일, 도쿄돔 대회[52]에서 열린 하시모토 신야와의 세 번째 대결은 NJPW 역사상 가장 큰 논란을 일으킨 사건 중 하나가 되었다. 오가와는 하시모토가 입장하는 도중 링 위에서 마이크를 잡고 "하시모토! 죽을 각오가 있다면 올라와!"라고 도발하는 전례 없는 행동을 보였다. 경기 시작 직후, 오가와는 카이파베(프로레슬링의 각본)를 깨고 '슛'(실제 공격)을 감행하여 하시모토를 실제로 구타했다. 하시모토는 당황하며 의미 없는 레그 다이브를 반복했고, 레퍼리 타이거 하토리가 중재하려 하자 발로 차는 등 비정상적인 경기 양상이 이어졌다. 오가와는 쓰러진 하시모토 위에 올라타(마운트 포지션) 주먹으로 머리를 가격하고, 엎드린 하시모토의 후두부를 밟는 등 무자비한 공격을 퍼부었다. 결국 하시모토가 링 밖으로 떨어지자 경기장은 술렁였고, 하시모토의 세컨드 나카니시 마나부 등과 오가와의 세컨드들이 뒤엉키면서 대혼란 속에서 경기는 노 콘테스트(무효 경기)로 끝났다 (6분 58초).

경기 후 링을 점거한 오가와는 양팔을 벌리고 뛰어다니는 퍼포먼스(UFO를 형상화)를 선보이며 "이미 끝났어! ... '''신일본 프로레슬링 팬 여러분, 정신 차리세요!'''"라고 외쳤다.[53] 링 아래에서는 양측 세컨드 간의 난투극이 벌어졌고, 오가와의 세컨드였던 무라카미 카즈나리는 이이즈카 타카시 등에게 집단 구타를 당해 일시적인 혼수상태에 빠지는 중상을 입고 입원했다. 당시 현장 감독이었던 죠슈 리키(나가슈 력)가 링에 올라와 오가와를 질책하기도 했다.[53] 이 사건으로 오가와는 '폭주왕'이라는 별명을 얻었으며, 이 난투극은 프로레슬링 역사상 최대 규모의 실제 싸움(가친코(ガチんこ))으로 평가받는다. 당시 전일본 프로레슬링 소속이었던 미사와 미츠하루는 이 경기에 대해 "프로레슬러가 약하게 보이는 경기였다"고 비판하기도 했다.[53] 훗날 2021년 8월, 오가와는 이 사건이 자신의 인기를 높이기 위해 안토니오 이노키의 압력으로 하시모토를 실제로 공격한 것이었다고 고백했다.[12]

1999년 5월, 오가와는 미국으로 건너가 가리 스틸을 꺾고 NWA 세계 헤비급 챔피언에 올랐다. 하시모토는 미국까지 그를 따라가 기자회견장에서 오가와를 공격(이번에는 각본상의 공격)하며 후지나미 다쓰미를 특별 심판으로 세워 일본에서 타이틀 매치를 열 것을 요구했다. 오가와는 미국에서 댄 세번, 더그 길버트 등을 상대로 타이틀을 방어했으며, 9월 25일 브라이언 앤서니가 포함된 3자간 경기에서 잠시 스틸에게 타이틀을 내주었다가 되찾은 후 일본으로 돌아와 하시모토와 네 번째 대결을 벌였다. 10월 11일 도쿄돔에서 열린 이 경기에서 오가와는 STO 연발로 하시모토에게 TKO 승리를 거두었다. (경기는 안토니오 이노키가 링에 난입해 중단시켰다.)

2000년 1월 4일, 1.4 사건 1년 후 오가와와 무라카미는 하시모토와 이이즈카 타카시를 상대로 태그 매치를 가졌다. 이 경기에서도 무라카미가 강력한 헤드킥으로 이이즈카를 실제로 KO시키면서 또다시 실제 싸움으로 번졌고, 양 팀은 링에서 난투극을 벌였다. 안토니오 이노키의 지시로 경기는 재개되었고, 결국 이이즈카가 무라카미에게 초크 기술을 성공시키며 오가와-무라카미 조가 패배했다.

이후 리키도잔 기념 대회에서 잠시 긴장된 동맹을 맺기도 했으나, 하시모토는 오가와에게 마지막 승부를 제안하며 자신이 패배할 경우 프로레슬링에서 은퇴하겠다는 조건을 걸었다. 2000년 4월 7일, 도쿄돔에서 열린 다섯 번째 싱글 매치에서 오가와는 여러 차례의 STO 끝에 하시모토를 KO로 꺾었다. 이 경기는 텔레비 아사히를 통해 골든 타임에 생중계되어 높은 시청률(평균 15.7%, 순간 최고 24%)을 기록하며 큰 화제를 모았다. 하시모토는 약속대로 은퇴식을 치렀으나, 팬들의 복귀 요청에 응해 은퇴 선언을 철회했다. 오가와 역시 경기 후 하시모토에게 은퇴하지 말라는 격려를 보냈다.

오가와는 릭슨 그레이시와의 경기를 준비하기 위해 2000년 7월 2일 NWA 타이틀을 반납했지만, 이 경기는 결국 성사되지 않았다. 이 시기를 끝으로 오가와의 신일본 프로레슬링에서의 주요 활동은 마무리된다.

3. 2. Pro Wrestling Zero-One (2001–2004)

2001년, 하시모토 신야가 프로레슬링 제로원을 설립하자, 오가와는 NJPW를 떠나 제로원에 합류했다. 그는 과거 라이벌이었던 하시모토와 함께 "OH 건(OH Gun)"이라는 태그팀을 결성했다. 초기에는 두 사람 사이에 불화가 있었지만, 결국 힘을 합쳐 UPW팀의 존 하이든라이히와 네이선 존스를 꺾고 NWA 인터컨티넨탈 태그팀 챔피언십을 획득했다. 오가와와 하시모토는 제로원 소속 레슬러들과 함께, 톰 하워드와 스티브 코리노가 이끄는 외국인 레슬러들과 대립 구도를 형성하며 활동했다.

3. 3. Hustle (2004–2007)

2004년, 오가와 나오야는 제로원과 격투기 리그 프라이드(Pride Fighting Championships)의 합작 프로젝트인 스포츠 엔터테인먼트 단체 Hustle (professional wrestling)|허슬영어 설립에 참여했다. 허슬의 스토리라인은 오가와와 프라이드 회장 사카키바라 노부유키의 연출된 기자회견을 통해 시작되었다. 인터뷰에서 사카키바라는 프로레슬링을 비판하며 MMA보다 열등하다고 선언했고, 이에 오가와는 격분했다. 사카키바라를 대표하는 다카다 노부히코와 오가와를 지지하는 하시모토 신야는 MMA 파이터와 프로레슬러 대표가 맞붙는 이벤트를 통해 각자의 주장을 증명하기로 결정했다. 오가와는 다카다가 챔피언으로 소개한 빌 골드버그와 경기를 가질 예정이었다. 그러나 이벤트 당일, 오가와가 골드버그를 제압했음에도 불구하고 다카다는 자이언트 실바에게 오가와를 공격하도록 지시했고, 결국 골드버그가 마무리 일격을 가하는 상황으로 이어졌다.

두 번째 허슬 이벤트에서 다카다는 자신을 악당 '몬스터 아미'(Monster Army)의 지도자 '총사령관 다카다'로 선언하며 프로레슬링 파괴를 목표로 내세웠다. 이에 오가와와 하시모토는 프로레슬러 연합체인 '허슬 아미'(Hustle Army)를 결성했다. 오가와는 허슬 아미의 리더가 되어 '캡틴 허슬'이라는 별명을 얻었고, "허슬!"을 외치며 특유의 힙 쓰러스트(hip thrust) 제스처를 선보이며 큰 인기를 끌었다. 첫 경기에서는 여러 몬스터 아미 멤버들의 도움을 받은 맷 가파리(Matt Ghaffari)에게 패배했지만, 이후 리키 초슈, 카와다 토시아키 등 실력 있는 레슬러들을 영입해 하시모토와 함께 반격에 나섰다.

같은 해 9월, 오가와가 프라이드 이벤트에서 표도르 예멜리야넨코에게 54초 만에 패배하자, 다카다는 이를 빌미로 오가와를 조롱하는 캠페인을 시작하고 54일간 허슬 출전을 금지시켰다. 이 금지령을 극복하기 위해 오가와는 헐크 호건의 미스터 아메리카 페르소나를 본뜬 가면을 쓴 기믹(gimmick) '캡틴 O'로 변장했다. 오가와는 캡틴 O가 진짜 호건이 변장한 것이라고 주장했다. 다카다의 측근인 안죠 요지(Commander An Jo)는 캡틴 O의 정체가 오가와임을 간파하고 몬스터 아미 레슬러들을 보내 그를 붙잡으려 했지만, 오가와는 이 기믹을 버리고 파란색 유도복을 착용한 '유도 O' 기믹으로 바꾸어 탈출했다. 유도 O는 허슬 리키시(Solofa Fatu)와 팀을 이루어 다카다의 부하인 하쿠시(Jinsei Shinzaki)와 용병 그레그 그루투이스(Gregg Groothuis, Russian 54)를 물리쳤다.

오가와가 링으로 복귀한 후, 허슬은 미치노쿠 프로레슬링과 공동으로 쇼를 제작했고, 미치노쿠 프로레슬링의 스타인 더 그레이트 사스케가 허슬 아미에 합류하기도 했다.

2007년, 오가와는 갑자기 허슬 아미를 배신하고 다카다 편에 합류했다. 그는 선글라스와 화려한 코트를 입고 자신을 '몬스터 셀러브리티'(Monster Celebrity)라고 칭하며 거만한 사교계 명사(socialite) 기믹으로 변신했다. 다카다는 오가와가 자신에게 세뇌되어 부하가 되었다고 주장했고, 오가와는 허슬 아미 멤버 반자이 치에(Banzai Chie)를 공격하며 충성심을 보였다. 이 스토리라인은 오가와가 안토니오 이노키가 설립한 단체 인오키 게놈 연합(Inoki Genome Federation)에 참여하면서 허슬 이적을 설명하기 위해 만들어졌다.

3. 4. Inoki Genome Federation (2007-2015)

오가와는 2015년 은퇴할 때까지 이노키 게놈 연합에서 활동했다.

4. 종합격투기 선수 시절

오가와는 하시모토 신야와의 대립 이후 프로레슬링 활동과 병행하여 종합격투기 무대에도 진출했으며, 특히 PRIDE를 중심으로 활동했다. 그의 종합격투기 전적은 다음과 같다.

결과전적상대방법이벤트날짜라운드시간장소참고
7–2요시다 히데히코서브미션 (암바)PRIDE Shockwave 20052005년 12월 31일16:04사이타마현 사이타마시, 일본
7–1표도르 예멜리야넨코서브미션 (암바)PRIDE Final Conflict 20042004년 8월 15일10:54사이타마현 사이타마시, 일본PRIDE 헤비급 그랑프리 준결승
7–0파울로 세자르 실바TKO (펀치)PRIDE Critical Countdown 20042004년 6월 20일13:29사이타마현 사이타마시, 일본PRIDE 헤비급 그랑프리 8강
6–0슈테판 레코서브미션 (암트라이앵글 초크)PRIDE Total Elimination 20042004년 4월 25일11:34사이타마현 사이타마시, 일본PRIDE 헤비급 그랑프리 개막전
5–0맷 가파리TKO (펀치)UFO: Legend2002년 8월 8일10:56도쿄, 일본
4–0사타케 마사아키서브미션 (리어 네이키드 초크)프라이드 112000년 10월 31일22:01오사카, 일본
3–0롭 피터스서브미션UFO Europe: Free Fight Gala1999년 11월 28일N/AN/A키이크다인, 네덜란드
2–0개리 굿리지서브미션 (아메리카나)프라이드 61999년 7월 4일20:36요코하마, 일본
1–0렌스 브롤릭서브미션 (리어 네이키드 초크)Red Devil Free Fight 11997년 9월 27일12:51암스테르담, 네덜란드



오가와는 종합격투기 데뷔 후 7연승을 거두었으나, 2004년 PRIDE 헤비급 그랑프리 준결승에서 당시 최강으로 평가받던 표도르 예멜리야넨코에게 첫 패배를 당했다. 이후 2005년 요시다 히데히코에게 패배한 것을 마지막으로 종합격투기 선수 활동을 마무리했다.

4. 1. 초기 활동

오가와는 NJPW 데뷔와 같은 해인 1997년, 첫 종합격투기(MMA) 경기를 치렀다. 네덜란드에서 크리스 돌먼이 주최한 이벤트에서 렌스 브롤릭과 맞붙어, 조르기 기술로 빠르게 승리했다.

본격적인 MMA 무대 데뷔는 프라이드 6에서 이루어졌다. 상대는 킥복서이자 얼티밋 파이팅 챔피언십(UFC) 베테랑인 가리 굿리지였다. 경기 초반, 오가와는 강력한 타격을 허용하고 모로테 가리 시도에 실패하는 등 MMA 경험 부족을 드러냈다. 하지만 결국 굿리지를 테이크다운하며 그래플링에서 우위를 점했다.[13] 오가와는 여러 차례 서브미션을 시도했고, 비록 성공하지는 못했지만 라운드 내내 굿리지를 압박했다. 2라운드에서는 스윕으로 굿리지를 넘어뜨린 후 우데가라미를 성공시켜 탭을 받아냈다.

경기 후 굿리지가 돈을 받고 일부러 져주었다는 소문이 돌았으나, 굿리지 본인은 인터뷰를 통해 이를 부인했다. 그는 익명의 제안을 거절하고 진심으로 싸웠으며, 오가와에게 정당하게 패배했다고 밝혔다.[14] 또한, 프라이드 임원 사카키바라 노부유키가 오가와를 이기면 특별한 대우를 약속했다고 덧붙이기도 했다.[15]

2000년에는 릭슨 그레이시와의 대결을 위해 협상을 진행했다. 당시 그레이시는 콜로세움 프로모션에서 후나키 마사카츠를 꺾은 직후였다. 오가와는 이 경기에 집중하기 위해 보유하고 있던 NWA 세계 헤비급 챔피언십 벨트까지 반납했다. 그러나 릭슨 그레이시 아들의 갑작스러운 사망으로 인해 모든 계획이 중단되었고, 둘의 대결은 결국 성사되지 못했다.[16]

4. 2. 주요 경기

오가와의 첫 고수준 종합격투기 경기는 PRIDE의 프라이드 6에서 열린 킥복서이자 UFC 베테랑 가리 굿리지와의 대결이었다. 오가와는 초반 강력한 타격을 허용하며 MMA 경험 부족을 드러냈으나, 결국 굿리지를 테이크다운하고 그라운드에서 우위를 점했다.[13] 2라운드에서 오가와는 굿리지를 '''스윕'''으로 넘어뜨린 뒤 '''우데가라미'''를 성공시켜 탭을 받아냈다. 경기 후 굿리지가 돈을 받고 져주었다는 소문이 돌았으나, 굿리지 본인은 이를 부인하며 정당하게 패배했다고 밝혔다.[14][15]

2000년 프라이드 11에서는 세계 가라테 챔피언 사타케 마사아키와 맞붙었다. 이는 클래식한 스타일 대결로 주목받았으며, 사타케가 이전에 오가와의 동료 무라카미 카즈나리를 이겼었기에 복수전의 성격도 띄었다. 1라운드는 탐색전 양상이었으나, 2라운드에서 오가와는 강력한 펀치로 사타케의 눈 부위에 상처를 입힌 뒤 테이크다운에 성공했고, '''리어 네이키드 초크'''로 승리를 거두었다.

2002년에는 안토니오 이노키가 설립한 유니버설 파이팅-아츠 오가니제이션(UFO)의 첫 이벤트에서 또 다른 올림픽 메달리스트이자 그레코로만 레슬링 챔피언인 맷 가파리와 대결했다. 가파리는 니킥으로 오가와를 KO시키겠다고 공언했지만, 실제 경기에서는 오가와가 스탠딩 타격에서 우위를 보였다. 경기 시작 1분 30초 만에 오가와는 오른손 펀치로 가파리를 비틀거리게 만들었고, 다운된 가파리는 더 이상의 공격을 받기 전에 기권했다. 경기장에 있던 릭슨 그레이시가 오가와에게 훈련을 제안하며 둘 사이의 대결 가능성이 다시 제기되었으나, 결국 성사되지는 않았다.[17]

2년 후인 2004년, 오가와는 자신이 속한 프로레슬링 단체 허슬(Hustle)의 대표로 PRIDE 그랑프리 토너먼트에 참가했다.

  • 1회전에서는 K-1 베테랑 슈테판 레코를 상대로 의외의 펀치 다운을 빼앗은 뒤 '''암 트라이앵글 초크'''로 제압했다.
  • 2회전에서는 자신보다 약 58.97kg 더 무거운 허슬 동료 레슬러 자이언트 실바를 테이크다운하고 '''그라운드 앤 파운드''' 공격을 퍼부어 심판 중단 TKO 승리를 거두었다.
  • 준결승에서는 팬 투표를 통해 당시 PRIDE 헤비급 챔피언이자 최종 우승자가 된 표도르 예멜리야넨코와 맞붙었다. 표도르는 오가와를 압도하며 경기 시작 54초 만에 '''암바'''로 승리했고, 이는 오가와의 종합격투기 첫 패배였다.


오가와의 마지막 종합격투기 경기는 2005년 PRIDE Shockwave 2005에서 열린 요시다 히데히코와의 대결이었다. 요시다는 과거 세계 유도 선수권 대회에서 오가와를 꺾고 우승한 경험이 있었다. 이 경기는 큰 주목을 받으며 종합격투기 역사상 최고 수준의 파이트 머니(각각 200만달러)가 걸린 시합 중 하나가 되었다.[18] 하지만 당시 오가와는 프로레슬링 활동에 집중한 반면, 요시다는 2002년부터 종합격투기에 전념하고 있었기 때문에 오가와에게는 여러모로 불리한 상황이었다.[19] 경기 초반 클린치 싸움 중 요시다가 '''고우치 가리'''로 오가와를 테이크다운 시켰다. 이후 요시다의 '''앵클 록''' 시도로 오가와는 발목이 골절되는 부상을 입었음에도 불구하고 빠져나왔다. 치열한 그라운드 공방 끝에, 오가와가 유리한 포지션을 점한 듯 보였으나 요시다가 가드 포지션에서 기습적인 '''암바'''를 성공시키며 승리했다.[19][20]

5. 은퇴 이후

그의 아들인 오가와 유세이 또한 유도 선수이다. 그는 일본 대표로 2018 세계 유도 선수권 대회에서 혼성 단체전 금메달을 획득했다.

6. 기타 활동

2002년경부터 오가와는 이노키와의 방향성 차이, 원래 종합격투기가 아닌 프로레슬러 지향이 강했던 점도 있어 주 활동 무대를 ZERO-ONE의 링으로 삼고, 오가와의 옛 라이벌 하시모토와 OH砲를 결성했다. '''칼룡노'''(가류도) (오가와의 STO와 하시모토의 수면 발차기를 결합한 합체기), '''오레 고토 카레'''(저먼 수플렉스를 거는 하시모토에게 상대와 함께 STO를 거는 기술)와 같은 합체기를 개발했다.

신일본 프로레슬링 참전 시대는 빅매치 출전이 중심이었던 탓에 같은 시기에 데뷔한 레슬러에 비해 프로레슬링 경력 부족은 부정할 수 없었지만, 이 무렵부터 마이크 퍼포먼스가 유창해지면서 오가와도 프로레슬러로서 성장했다.

7. 논란 및 비판

2004년 1월부터 하슬에 참가하며 "3, 2, 1, 하슬! 하슬!"이라는 구호와 포즈로 인기를 얻었다. 이 구호는 당시 프로야구 선수였던 키요하라 가즈히로나 자민당 간사장이었던 아베 신조 등 유명 인사들도 따라 할 정도로 화제가 되었다. 같은 해 PRIDE 그랑프리에 참가하여 스테판 레코와 자이언트 실바에게 승리했으나, 준결승에서 에밀리아넨코 표도르에게 1라운드 54초 만에 암바로 패배했다. 오가와는 경기 결과와 상관없이 하슬 홍보에 집중하는 모습을 보였다. 표도르에게 패배한 후 '54초 만에 졌다'는 이유로 54일간 하슬 출전 정지 처분을 받기도 했으나, 정지 기간 중 '캡틴 오'라는 다른 이름으로 경기에 출전했다.

같은 해 9월에는 싱글 CD 「하슬 온도」를 발매하고 TV 가요 프로그램에 출연했으며, 2005년 6월에는 이와사 마유코와 듀엣으로 싱글 CD 「勝手に侵略者」(애니메이션 케로로 중사 엔딩 테마곡)를 발매했다. 같은 해 11월에는 포토 에세이 「裸の選択」을 발매하는 등 연예 활동도 병행했다.

2007년 6월, 하슬의 스토리 전개에 따라 악역 군단인 고다 몬스터 군으로 이적하여 '셀럽 오가와'라는 이름으로 활동했다. 이 시기 오가와는 비열한 반칙을 사용하거나 상대 선수를 조롱하는 등의 탐욕스러운 악역 캐릭터를 연기했다. 이러한 모습은 관객들로부터 큰 야유를 받았으며, 일부 관객은 "싸구려"라고 비난하기도 했다. 이후 고다 총통의 명령으로 하슬 활동을 잠시 중단했다.

7. 1. 하시모토 신야와의 대립 관련 논란

2003년 말, 하슬 출범 기자회견에서 DSE 사장 사카키바라 노부유키가 "하슬은 프로레슬링(쇼)이기 때문에…"라며 프로레슬링을 폄하하는 듯한 발언을 하자, 오가와는 "시끄러워! 프로레슬링을 얕보고 있냐!"라고 외치며 테이블을 뒤엎는 등 격분했다. 당시 함께 있던 하시모토 신야가 오가와를 제지하며 소동은 일단락되었다.

2005년 12월 31일 열린 PRIDE 男祭り 2005의 메인 이벤트 요시다 히데히코와의 경기에서는 특별한 장면이 연출되었다. 오가와는 그해 7월 갑작스럽게 세상을 떠난 하시모토 신야의 입장곡인 '폭승선언' 전주에 맞춰 등장했다. 잠시 후 자신의 테마곡으로 바뀌었지만, 링으로 향하는 길에 다시 '폭승선언'이 울려 퍼졌다. 예상치 못한 선곡에 관중석은 술렁였고, 곡이 바뀌는 순간 오가와는 감정이 북받치는 듯한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 비록 경기는 요시다에게 암바로 패했지만, 경기 후 오가와는 경기 초반 요시다의 기술에 발뼈가 부러졌다고 고백하며 부상에도 불구하고 끝까지 싸웠음을 밝혔다. 제대로 서 있기도 힘든 상태에서 하슬 포즈를 취하며 마무리했다. 요시다는 이후 인터뷰에서 오가와의 근성을 인정하는 발언을 남겼다.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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